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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中 시간의 의미

소사블 2021. 4. 2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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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물결" 책에서 농업시대의 시간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우리는 앞 장에서 기계의 리듬에 따라 맞추어진 인간행동의 동시성이 산업주의의 확산에 얼마나 공헌했는가 살펴보았다. 동시화는 제2의 물결문명을 인도하는 주요 원리의 하나여서 국외자의 눈으로 보자면 산업주의를 이행하는 사람들은 시간에 얽매여 항상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의식과 동시화를 이룩하기 위해선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가정이 바뀌어야만 했다. 새로운 시간의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씨를 뿌릴 때와 수확할 때를 알아야 했으므로 시간의 장기적 단위측정은 상당히 정확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을 하는데에 동시성이 필요없었기 때문에 농사꾼들은 시간의 단기적 단위측정은 할 필요도 없었고 정확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대체로 그들은 시간을 분, 시간단위처럼 딱 정해놓은 단위로 인식하기보다는 밥하는 때, 잠잘 때처럼 일상생활을 처리하는 기준에 맞춰 시간을 인식했다. 농부의 입장에선 소 젖짜는 동안이면 어느 만큼의 길이인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밥하는 동안’, ‘메뚜기 튀기는 동안처럼 시간의 길이를 지칭하는 단위가 많이 있다. 영국에서도 주기도문 외는 동안이라던가 보다 원색적으로 오줌 눌 동안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비슷하게 이웃 마을과 교류를 할 필요도 없었고 일 자체도 그러했기에 시간의 단위는 지방에 따라
, 계절에 따라 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중세 북유럽에서는 낮 동안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있지만 새벽부터 해질녘까지의 길이가 틀리므로 12월의 1시간은 3월의 1시간과 같지 않았다.


주기도문 외는 동안처럼 막연한 시간을 대신해서 시··초와 같이 정확히 구분되는 시간의 단위들이 산업사회에는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 단위는 계절이나 공동체의 차이에 상관없이 두루 쓰일 수 있도록 표준화가 되어야만 했다. 오늘날엔 전 세계가 간단히 시간단위가 통일되어 우리는 표준시라는 말을 한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어디에서건 GMT(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를 사용한다. 영국의 그리니치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후 이곳은 온 세계의 시간을 재는데 기준이 되었다. 그 이래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듯이 정기적으로, 그리고 일제히 시계를 한 시간 늦추기도 앞당기기도 한다. 아무리 우리가 시간이 안 가는 것처럼 느끼거나 반대로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간다고느끼더라도 1시간이란 규격화된,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의 시간이 된 것이다.

-앨빈 토플러3의 물결114p 인용

☞ 우리는 언제나 매일 딱딱 고정된 시간에 맞춰서 생활한다. 7시 기상. 9시 출근. 12시 점심시간, 6시 퇴근 등등..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것에 맞는가? 그것은 위에서 밝혔듯 산업화시대부터 정교화되어진 일이었다. 과연 미래 사회에서도 이런 일률적 시간 스케쥴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지 의문이 든다.

요즘 일부 기업체에서는 자율근무시간제를 활용하여, 자기 컨디션이 만약에 새벽인 사람은 새벽에 근무하고, 오후에 최상인 사람은 오후에 근무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장차 일의 양이 아니라, 그 질이 중요하고, 언제까지 시간을 맞추느냐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는 의미있는 창의적 생각은 시간과 무관하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야밤일수록 감성적이고 시와 글도 저절로 잘 써지지 않는가?)

 

산업화 이후부터 전세계 시간대는 통일되고, 문명이 발달한 것이 풍요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삶의 패턴들을 억압하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우리는 시간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시계의 발명이란 보이지 않는 변화의 세계를 보이는 (숫자로, 시계바늘로 가리켜지는) 것으로 바꾼 것 같다. 이것이 문명이고 우리의 자연스러움을 해친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누구나 똑같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시간도 존재한다. 

내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 1시간은 앞으로 10년이상 세월에서 무수히 되뇌이고, 객관적으론 짧지만 오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1시간이 아무 의미없이 예전 불쾌한 일에 휩싸여 불쾌한 감정에만 빠져서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은 제대로 시간을 누린 것이 아니다.  우리 의식은 늘 언제나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상념에 잠기는데, 사실 같은 종류의 기억을 반복하며- 만족스러운 경험도 아닌 불쾌한 경험- 그냥 끙끙 앓으며 과거 사건에 얽매인다. 누군가에게 비난당했던 사건,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스스로 자초하며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에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다. 

 

즉, 위에서 말하는 것은 시간은 객관적으로 하루 24시간 형태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마다 시간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현대에서 일률적으로 시간을 제약하는 것이 늘 현대인에게는 허둥지둥 대게 만든다.

출근길의 지각 하지 않으려고 긴장감 도는 모습

 

그렇다면 현대인도 현대 시간 시스템안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누린다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런 획일적 문명하에서도 개인의 시간 관리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쉽게 '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개인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하루에 1시간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자는 시간 1시간을 줄여서라도 나만을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여 마음껏 시간의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그때의 1시간은 딱딱하게 끌려가는 일상의 1시간과 차원이 다르다. 시간을 잊게 하는 자유로움의 시간인 셈이다. 시간안에 있지만 시간을 잊고 고요하게 무엇을 몰두할 때의 평온함은 스스로 찾아서 매일 확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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